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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세의 국가무형문화재 제77호 이봉주 방짜원대장 이야기
‘메질 많이 해야 황금으로 빛난다.’
2023년 07월 04일 (화) 16:24:44 장상인 JSI미디어 대표이사 renews@renews.co.kr

“방짜유기 아시죠? 대한민국 최고의 방짜장인이 있습니다. 만나러 갈까요? 무려 97세이십니다.”

“좋습니다. 무엇보다도 97세의 나이에 작품 활동을 하신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얼마 전 커피숍에서 김옥석(75)씨와 필자가 나누던 대화다. 우리는 의기투합해서 방짜원대장을 만나기로 했다. 김옥석씨 또한 국가무형문화재 창립 멤버이자 사무총장을 지낸 사람이다. 그는 인간무형문화재의 권익을 위해서 기능 전수자를 총망라하는 인명록을 집대성하기 위해전국 방방곡곡을 뒤지고 다니는 특별한 사람이다.

목적지는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갈전리. 필자는 차창 밖 신록의 아름다움을 외면하고 방짜유기(方字鍮器)에 대해 벼락공부를 했다.

‘방짜유기는 우리민족이 어려움 속에서 전승해온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구리와 주석의 합금인 놋쇠에 열을 가해서 녹인 후 망치로 두들기고 찬물에 담금질해서 제작하는 방법이다.’

‘전통유기는 만드는 방법도 세 가지가 있다. 구리와 주석을 78:22의 비율로 섞은 금속(놋쇠)을 1200~1300°C의 높은 온도로 녹인 후 망치로 두들기고 때려서 만드는 방짜유기와, 쇳물을 일정한 틀에 부은 후 깎아서 그릇을 만드는 주물유기, 주물기법과 방짜기법을 혼용해서 만드는 반(反)방짜유기가 있다.’

‘평안북도 정주군 마산면 납청마을은 조선시대 때부터 방짜유기가 크게 발달했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방짜유기는 특별히 납청 양대유기(良大鍮器)라고 불릴 정도로 좋은 품질로 인정받았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공장 문경에 있어

터널을 수없이 지나고 다리를 건너 목적지에 도착했다. 하얀 구름들도 쉬어가려는 듯 머물러 있는 갈매봉(573m)아래 공장이 있었다. 공장에 들어서자 작업복 차림의 이봉주(97)선생이 필자 일행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먼 길 오시느라 수고들 많으셨습니다.”

자세도 꼿꼿했지만 목소리에도 힘이 있었다. 100세를 바라보는 노인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방짜유기에 대한 선생의 설명이다.

   
(방짜유기에 대해서 설명하는 이봉주선생)

“방짜유기는 똑똑하고 지혜로운 성질을 가진 금속입니다. 구리(78%)와 주석(22%)을 정확한 비율로 합금한 상질의 놋쇠로 만듭니다.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강해지고, 살균과 항균 기능을 가진 건강한 금속으로 태어납니다.”

건강한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져야 건강한 금속이 태어날 것 같았다.

이봉주 선생은 <메질 많이 해야 황금으로 빛난다>는 자신의 회고록을 내보이면서 말을 이어갔다.

“우리 민족의 역사는 4000년 청동기 문화와 함께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단순한 그릇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음악과 과학을 하나로 묶었던 것입니다.”

세계 최대 크기의 징을 만들다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작경 143cm의 징을 치는 선생)

이봉주 선생은 대한민국 유기장의 자존심을 걸고 방짜기법으로 세계최대인 직경 161cm의징을 만들었다. 현재 대구박물관에 있는 이 징은 기네스북에도 등재됐다.

또한 10kg 이상은 불가능 할 것으로 여겨온 좌종(坐鐘)도 만들어냈다. 끈질긴 장인의 도전정신이 아니면 해낼 수 없는 일이다. 그가 말하는 종(鐘)이야기다.

“종소리는 가슴에 울림이 오는 일종의 텔레파시입니다. 즉, 마음(心)이지요. 소리가 가슴에 닿는 것입니다.”

북아시아의 대종들은 대개 맑고 높은 소리보다는 진중하고 길게 울리는 소리를 내도록 만들어져 있는데, 신라 성덕대왕 때 만들어진 ‘에밀레종’이 대표적이다.

   
(과학과 음을 융합한 좌종들)

이봉주선생은 1926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월남 후 정주지역 납청에서 이어져 온 방짜기법을 되살린 장본인이다. 남북분단으로 그 명맥이 단절될 수 있었으나 그의 끈질긴 노력으로 다시 우뚝 선 것이다.

필자가 질문했다. ‘방짜유기는 어느 나라에서 만들고 있나요?’

“방짜유기는 한국을 비롯해서 미국·중국·튀르키예·인도네시아·네팔에서 만들고 있습니다.”

의외였다. 미국이 방짜유기를 생산한다는 사실이. 이봉주 선생은 1981년 미국의 심벌즈 제조회사인 질디언(Zildian)社에 방짜로 만든 징을 소개했고, 이듬해는 그 회사의 초청으로 미국에서 근무했다. 선생의 말이다.

“미국·중국·튀르키예·인도네시아·등을 여러 번 다녀왔지만 작업내용은 대동소이(大同小異)했습니다. 하지만, 2012년 용해(溶解)에 대해서 새로운 기법을 찾았습니다. 쇳물이 끓는 곳에 물이 약간이라도 묻은 물질이 들어가면 쇳물이 폭발해서 안전사고가 나기 때문입니다. 직원들 교육 시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용해의 변천 단계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콕스(석탄의 일종)를 사용하다가 석유버너로 용해하는 것이 1차 개혁이라면, 2차 개혁은 쇳물을 물에다 붓는 방법입니다. 이 기술이 전통기법은 아니지만, 불량률이 30%에서 1%로 낮추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용해의 변화도 계속됐다. 2018년 현재 3차 개혁이라고 할 수 있는 전기로(電氣爐)의 사용이다. 이때부터 불량문제를 100% 해결한 것이다.

그는 1983년 6월 국가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 보유자로 인정됐다. 하지만, 그 해에 불행한 일도 있었다. 작업도중에 쇳조각이 눈에 튀어 한쪽 눈을 잃고 말았다.

“작업자의 잘못이었으나 탓하지 않았습니다. 이 또한 저의 운명으로 생각했으니까요.”

선생은 한동안 의안을 했으나 지금은 하지 않고 있다.

그는 1988년 서울올림픽 때는 축하공연용 바라 400쌍을 만들어 기증하기도 했다.

   
(2002년 미국 부시대통령 내외가 방한 시 사용했던 이봉주선생의 방짜유기 제품)

2013년 국가무형문화제 제77호 유기장 명예보유자(후계자를 위해 명예 보유자로 승격함)로 인정됐다. 선생의 아들 이형근 씨가 가업을 잇고 있고, 최근 은행에 다니던 손주가 사표를 내고 공장에 합류했다.

<매질 많이 해야 황금으로 빛난다>는 이봉주 선생의 회고록이 있다. 매질에 대한 장인의 혼(魂)이 녹아 있는 책이다. 개인의 회고록이 아니라 한국 근대사이기도 했다. 송자 前연세대총장은 책의 출간을 축하하는 말에 “잊혀져가는 것을 홀로 이어가면서 예술의 경지에 도달한 작품을 만드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했다. 이토록 어려운 일을 선생은 많은 매질로 황금빛 방짜유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는 경이로운 일이다.

두드림으로 세상을 이롭게 하는 방짜유기 10가지 이야기

이봉주 선생은 밤 10시면 잠자리에 든다. 그러나 누워서도 미래를 꿈꾼다. 새벽 5시면 눈을 뜬다. 7시면 어김없이 작업장에 나간다.

“새로운 제품? 세계적인 제품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다보면 스르르 잠이 들다가 다시 깨어나지요.”

97세의 나이에 세계를 향한 꿈을 꿀 수 있을까. 하지만 그는 하고 있다. 사람들이 건강한 방짜유기로 슬기로운 생활을 영위하도록 하기 위한 꿈이다.

“방짜유기는 우리 몸에 해로운 병원균을 살균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몸에 이로운 미네랄 성분을 만들어 냅니다. 음식에 있어서 가장 맛있는 온도를 지켜주는 보온과 보냉의 효과가 탁월하니까요.”

이봉주 선생은 어항에 넣을 작은 물고기 모양의 방짜를 들고 온 직원에게 ‘잘못만들었다’고 OK사인을 하지 않았다. 그만큼 꼼꼼하게 체크하고 있음이다.

2004년 시화공단에 있던 납청 양대공장을 이곳(문경)으로 이전했고, 현재는 유기전수관과 전통공방을 개설해서 방짜유기 제조기술을 전수하고 있다.

그의 꿈은 또 있다.

“청동기 방짜의 문화와 스포츠를 접목하려고 합니다. 우리 배우들이 할리우드에서 상(賞)을 받듯이 제가 고안한 골프채로 세계대회에서 우승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티타늄·알미늄·텅스턴이 융합된 것이 바로 방짜유기니까요.”

이 또한 우리의 방짜유기를 전 세계에 알리는 신호탄이 될 듯싶다.

   
(1300도의 용광로에 불을 지피는 이봉주 선생)

인터뷰를 마친 이봉주 선생은 다시 작업장에 가서 1300도의 용광로에 불을 지폈다. 공장 밖의 기온이 30도를 넘은 무더위가 계속됐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작은, 아주 작은 더위에 불과했다.

“과거에 나에게 남은 생의 소망이 무엇인지 물으면 떠난 지 70여 년이 지난 평북 정주의 고향 땅을 밟아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저의 희망은 방짜유기 기법이 원형대로 보존되는 것입니다”라는 이봉주 선생의 말이 길게 여운(餘韻)을 남겼다.

(※출처: 월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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