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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의 그늘에서 인간의 빛을 밝힌 일본인 형제
한일 교류의 공간, 아사카와 노리타카·다쿠미의 자료관을 찾다
2019년 06월 20일 (목) 11:57:48 장상인 발행인 renews@renews.co.kr

“조선에는 나의 운명을 좌우할 뭔가가 기다리고 있음이 틀림없다. 나는 저 나라의 부름을 받고 있다.”
 
에미야 다카유키(江宮隆之·71)의 소설 <백자의 사람>에 쓰여 있는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1891-1931)의 말이다. 다쿠미(巧)는 조선에서 살고 있는 어머니와 형(伯敎)의 부름을 받고서 ‘또 다른 부름’을 가슴 속에 넣으며 조선 행(行)을 결심했던 것이다. 운명처럼 조선의 흙이 되었지만.
 
‘나에게도 뭔가의 부름이 있었을까.’
 
지난 15일 아사카와 노리타카(淺川伯敎, 1884-1964)와 아사카와 다쿠미 형제의 고향 마을 야마나시(山梨)현을 찾았다. 도쿄에서 기차로 이동해 요코하마(橫浜)에서 승용차를 타고서 비가 내리는 고속도로를 3시간 정도 달리자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야마나시가 나왔다.
 
야마나시(山梨)의 산골에서 태어난 노리타카(伯敎)와 다쿠미(巧)
 
노리타카(伯敎)·다쿠미(巧) 형제는 야마나시 현에서 태어났다. 농사를 지으면서 염색 공장을 운영하는 집안이었다. 다쿠미가 모친의 뱃속에 있을 때, 부친이 병사했다.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친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 그의 형 노리타카(伯敎)가 아버지를 대신했다. 생각만으로도 가여운 일이다.

   
백자를 상징하는 기념물

호쿠토시(北杜市) 다카네초(高根町)에 자리한 두 형제의 자료관에 도착했다.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도자기 형상의 기념물에서 자료관의 상징성을 느낄 수 있었다. 자료관 입구에 자리한 징과 북, 김칫독 등 한국 냄새가 물씬 풍겼다.
 
“어세 오세요. 먼 길을 오셨습니다.”
 
 ‘노리타카·다쿠미 형제 추모회’의 사무국장  히나타 요시히코(比奈田善彦·65) 씨가 먼저 필자에게 인사말을 했다. 표정도 밝았고 목소리도 경쾌했다. 아사카와 노리타카·다쿠미 형제 추모회’의 치노 쓰네오(千野恒郞·77) 회장을 비롯해서 간부들이 대거 기다리고 있었다. 이 추모회는 1996년에 결성돼 올해로 23년째를 맞고 있으며, 500여 명의 회원을 두고 있다.

   
자료관 입구의 모습


<다카네초에서 태어나 야쓰가타케(八ケ岳)  남쪽 기슭의 자연 속에서 성장해서, 일본의 식민지 통치하의 시절 조선에 건너가, 조선 공예의 아름다움에 매혹된 형제의 삶과 업적을 소개하고자 한다. 한일 우호의 정보 발신지이고 싶다.>
 
자료관의 안내문이다. ‘한일 우호의 정보발신지’라는 말이 특히 울림이 있었다.
 
두 형제가 남긴 소중한 유산들

   
아메미야 마사키 관장

자료관에 대한 설명은 아메미야 마사키(雨宮正樹) 관장이 했다. 그는 자료관의 설립 역사와 배경과, 전시된 품목에 대해서 설명했다.
“2001년 7월 18일. 이 자료관이 문을 열었습니다. 조선을 사랑한 두 형제의 업적을 기리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약 53평의 자료관은 형제에 대한 것을 포함해 한국의 민예품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메미야 관장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1913년에 조선에 간 형 노리타카는 조선의 미술품과 도자기에 매료돼, 700여 곳이 넘는 조선 도자기 산지의 가마 흔적 조사에 전념했답니다. 도자기의 시대적 변천을 밝힌 연구 성과는 조선 도자기 역사의 기본 문헌으로 자리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형 노리타카가 조사한 도자기 가마터

필자는 동생 다쿠미(巧)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으나, 형 노리타카(伯敎)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된 것은 큰 수확이었다. 관장은 동생 다쿠미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동생 다쿠미는 형의 부름을 받고 1914년 조선에 건너가 조선총독부 임업 시험장에 근무했습니다. 산과 들의 녹화에 힘을 쏟으면서도 형의 가마터 흔적 조사에 동행하면서 조선 민족미술관 건립을 기획했습니다. 조선의 다섯 잎 소나무(잣나무)의 ‘노천 매장법’을 개발했고, 민둥산의 녹화 작업을 실행했던 것입니다.”
 
전시관은 아사카와 형제가 접했던 당시의 조선의 모습을 의식주로 나누어 전시하고 있었다, 조선의 밥상과 가구, 조선의 식사 풍경, 병풍, 족자, 한복, 유품, 기증품 등이 당시의 상황들을 그대로 전하고 있었다. 더불어, 청자와 백자의 대표적 작품과 지순택 선생과 류해강 선생의 작품들이 전시장을 빛나게 하고 있었다.

 

 

 
씨앗 파종에 대해 설명하는 다쿠미의 모습(재현)


“여기에 중요한 보물이 있습니다. 아사카와 타쿠미의 일기입니다.” 

   
다쿠미의 일기

히나타(比奈田) 사무국장이 필자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서울의 김성진(金成鎭) 씨로부터 기증받은 것으로부터 다카네초와 한국의 교류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형 노리타카가 1945년에 맡긴 다쿠미의 일기를 김성진 씨는 한국전쟁 중에도 가슴 속에 넣고 부산에 피난을 가셨다고 합니다. 그의 일기에는 조선의 사람들과 문화에 대한 내용, 일본통치하의 생활상이 적나라하게 쓰여 있습니다.”
 
‘일기를 쓴 사람도, 그것을 소중하게 간직한 사람도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전시된 자료들과 눈을 맞췄다. 뜻있는 사람들의 정성과 땀이 밴 소중한 자산임에 틀림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두 형제를 소개하는 7분짜리의 영상물을 감상했다.
 
“조선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형, 조선인의 마음을 살았던 동생”
 
영상물에 담긴 두 형제의 아름다운 발자취를 뒤로 하고 자료관을 나섰다.
 
두 형제의 눈물이런가. 비가 주룩주룩 대지를 적시고 있었다. 멀리 ‘야쓰가타케’ 산봉우리가 흐릿하게 보였다. 

야쓰가타케는 나가노현의 스와(諏訪) 지역과 사쿠(佐久) 지역 및 야마나시현을 가른다. 가장 높은 아카다케(赤岳, 2899m) 등 8개 산 들로 구성돼 있다. 이를 ‘남(南) 야쓰가타케’라고 한다. 한편 ‘북(北) 야쓰가타케’는 덴구타케(天狗岳, 2646m), 다테시나산(蓼科山, 2530m) 등 11개의 산을 일컫는다, 이를 통틀어 ‘야쓰가타케 연봉(八ヶ岳連峰)’이라고 부른다.
 
늘 푸른 다쿠미...40년의 짧은 인생(人生)
 
아사카와 다쿠미는 ‘야쓰가타케’ 산 속에서 바위종달새의 맑은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자랐다. 들국화와 코스모스를 사랑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1897년 4월 심상소학교에 입학했고, 1906년 야마나시(山梨) 현립농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야마나시(山梨)현이 나무를 무더기로 벌채하는 바람에 하천이 범람해 232명이 목숨을 잃은 참상을 목격하고, 치수(治水)의 근원인 조림의 중요성을 가슴 속 깊이 새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산림이 우거진 야마나시...산봉우리의 구름도 한 폭의 그림이다.


1909년 3월 현립농업학교를 2등으로 졸업한 그는 아키타(秋田)현 오다테(大館) 영림서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1914년 5월 17일 조선의 경성부 독립문 통 3-6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일본의 역사학자이자 평론가인 다카사키 소지(高崎宗司·77)는 <아사카와 다쿠미 평전>에서 그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다쿠미(巧)가 하는 일 중에서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이 또 있었다. 다름 아닌 전국 순회강연이다. 그는 추위가 가시지 않은 이른 봄 2월부터 3월에 걸쳐 전국을 돌며 양묘법(養苗法)에 대해 강연을 했다. 2월 17일 부산, 3월 12일 충북 청주에서 강연을 하고, 3월 15일 경성(서울)으로 돌아왔을 때 감기에 걸렸다. 그런 가운데서도 3월 18일 감리교 서부 연회에 참석했고, 26일 전국 각지에서 찍은 사전전시회를 열었다. 다음 날인 27일 다쿠미(巧)는 급성 폐렴으로 쓰러졌다. 4월 1일 오전 가족들은 ‘그의 병세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하고,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전보를 쳤다. 1931년 4월 2일 밤. 그는 조선 땅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고 말았다. 그의 나이 겨우 40세. 안타까운 나이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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