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업계가 호남고속철도 입찰에서 담합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사상 최대 규모인 4355억원에 달하는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이로써 지금까지 건설사가 냈거나 내야 하는 과징금만 9198억원에 달하고 연말까지 1조원을 넘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천문학적 과징금이 부과됨에 따라 건설업계 죽이기라는 볼멘소리가 나오고 있는 가운데 앞으로 발주기관들이 계약심의위원회를 열어 입찰참가제한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어서 추가 제재도 불가피한 상황이다.
건설업계는 하나의 담합행위에 대해 과징금, 부정당업자 제재, 등록말소 처분, 형사 처벌 등 많게는 6개의 중복처분을 부과하는 것은 과잉제재라며 제도 개선이 절실하다고 토로하고 있다.
◇사상 최대 과징금 부과…공정위, 담합으로 낙찰률을 높여
27일 공정위와 건설업계에 따르면 공정위는 한국철도시설공단이 2009년 발주한 호남고속철도 건설공사 입찰과정에서 최저가낙찰제 13개 공구 2조4898억원, 대안 3개 공구 및 차량기지 공사 1조1082억원 등 총 3조5980억원에 달하는 입찰담합을 적발하고 23개 건설사에 과징금 4355억원을 부과했다. 또 시정명령과 함께 15개 법인과 개인 7명을 검찰에 고발했다.
호남고속철도 건설공사의 담합 과징금은 그동안 최대였던 인천지하철 2호선 사업의 1322억원을 훌쩍 넘어 사상 최대를 기록하는 불명예를 안았다.
호남고속철도의 담합 과징금이 이처럼 천문학적인 금액으로 늘어난 데는 최저가낙찰제 공사에서 담합을 통해 낙찰률을 과도하게 높인데 따른 일벌백계 차원으로 분석되고 있다.
최저가낙찰제 공가의 경우 13개 공구 2조4898억원 공사에 과징금 3479억원이 부과돼 비율이 13.97%에 달한다. 통상 매출액의 10%를 과징금으로 부과하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반면 대안 3개 공구 및 차량기지 공사는 1조1082억원 공사인데 과징금은 10%도 안되는 876억원을 부과했다.
이처럼 공정위가 최저가낙찰제 공사에만 유독 과징금을 높게 부과한 것은 건설사들이 담합을 통해 낙찰률을 과도하게 높여 죄질이 불량하다고 판단했다는 분석이다. 호남고속철도 최저가낙찰제 공사의 평균 낙찰률은 78.53%로 종전 낙찰률을 큰 폭으로 상회하고 있다.
대한건설협회에 따르면 연간 최저가낙찰제 공사의 평균 낙찰률은 2004년 58.2%, 2005년 60.3%, 2006년 66.1%, 2007년 68.6%, 2008년 71.9%, 2009년 73.7%, 2010년 73.3%, 2011년 73.0%, 2012년 75.6%, 2013년 74.2%였다. 호남고속철도 최저가 입찰에서 건설사들이 담합을 통해 낙찰률을 올렸다고 볼 개연성이 있다.
업계 관계자는 "과징금이 사상 최대를 기록한 것은 낙찰률 상승이 결정적인 이유인 것으로 보인다"며 "여기에 낙찰받은 건설사뿐만 아니라 들러리를 선 건설사에도 과징금을 부과, 규모가 확대됐다"고 말했다.
호남고속철도 담합건으로 4355억원의 과징금이 부과됨에 따라 건설업계는 최근까지 15개 사업에서 9198억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현재 공정위가 LNG 인수기지, 천연가스공급주배관 등의 공사에서 광범위하게 담합조사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져 연말까지 부과될 과징금은 1조원을 훌쩍 넘길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안그래도 건설·부동산경기 침체로 수익이 줄어들고 있어 한푼이 아쉬운 건설업계로서는 막대한 타격이다. 현재 입찰담합 처분업체 59개사의 지난해 말 영업이익은 거의 발생하지 않았고 해외손실을 선반영하면서 당기순손실만 4조원이 넘는다.
◇과잉제재는 없애야…건설업계, 제도 개선 추진
공정위의 과징금 부과에 대해 건설업계는 '과징금처분 취소소송'으로 대응할 전망이다. 이미 건설업계는 4대강 살리기 사업에 대한 담합 과징금 부과에 소송을 제기했고, 인천지하철 2호선사업도 과징금처분 취소소송을 냈다.
문제는 하나의 입찰건에 대해 과징금 부과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당장 각 발주기관들은 계약심의위원회를 열고 해당 건설사에 대한 부정당업자 제재 여부를 확정하게 된다. 부정당업자로 지정되면 길게는 2년까지 입찰참가가 제한된다. 수주가 기업경영의 핵심인 건설사 입장에서 입찰참가제한은 기업의 생사를 가를 문제다.
여기에 등록말소 처분, 형사 처벌 등 많게는 6개의 중복처분을 부과하고 있어 과잉제재라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대형건설사 CEO들은 지난 23일 열린 '건설공사 입찰담합 근절 및 경영위기 극복방안 토론회'에서 "건설업체의 입찰담합 불공정 행위가 드러나면서 국민께 심려를 끼쳐드린 것에 대해 깊이 반성하며, 앞으로 준법경영을 강도 높게 실천해 건설시장의 공정경쟁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선처를 호소하면서 제도개선이 필요함을 피력한 것도 이같은 과잉제재 논란 때문이다.
선진국의 경우 경제사범인 담합 등 부정당행위에 대해 경제적 불이익만을 부과하고 있고, 우리와 입법례가 비슷한 일본도 상대방의 가격 수준과 동향에 대한 정보교환은 담합으로 보지 않고 있다.
이호영 한양대 교수는 "종래의 관행적 건설 입찰담합이 우리나라 건설시장의 구조적 특징과 함께 경쟁제한적 법·제도와 현행법상 입찰담합에 대한 각종 제재가 중첩되고 과도한 측면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이어 "과거 영국 공정거래청의 입찰담합 일괄조사 사례처럼 건설입찰 담합에 대한 일괄조사, 건설입찰담합 제재의 합리적 조정, 부정당업자 입찰참가자격제한 취소 등 다양한 조치들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대한건설협회도 과잉제재에 대한 개선작업에 본격적으로 나설 예정이다. 현재 협회는 형사정책연구원에 담합이 발생하는 원인과 외국사례, 과도한 중복제제 문제 등을 개선하는 내용의 용역을 의뢰했다. 협회는 이를 바탕으로 9~10월께 국회에서 세미나를 개최한 뒤 제도 개선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협회 관계자는 "개별 건설사도 불공정관행 근절을 위한 기업문화 개선노력을 강도높게 추진중"이라며 "이번 담합 논란을 계기로 보다 성숙된 제도 개선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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