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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안거(夏安居)의 사찰에서

2013년 09월 02일 (월) 12:06:58

이병희 기자 정리

renews@renews.co.kr

부산 백양산의 여름도 이제는 막바지로 치닫고 있습니다. 한낮에는 여전히 푹푹 찌는 듯하지만 산책로를 따라 이어진 울창한 편백나무 숲에서는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기록적인 폭염 속에서도 어느새 입추, 처서가 지나고 며칠 뒤면 찬 이슬이 내린다는 백로가 다가오고 있으니 말입니다. 오락가락 시원한 빗소식도 들려옵니다. 바람도 쐴 겸 세속에 헝클어진 마음을 추스를 수 있을까 해서 둘러둘러 찾은 백양산 기슭의 삼광사 풍경입니다.

마침 삼광사는 하안거(夏安居)의 정진 기간입니다. 저녁이 되면 법복 차림의 불자들이 여기저기서 줄지어 몰려드는 것이 그런 까닭입니다. 삼광사가 소속된 천태종 산하의 사찰들이 모두 마찬가지겠지요.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마음을 닦으라는 주경야선(晝耕夜禪)의 가르침에 따라 밤중 예불에 참석하려는 행렬입니다. 마을버스 편으로 계속 이어지는 행렬에서 국내에서 한두 손가락에 꼽힌다는 삼광사의 신도 규모를 간단히 짐작하게 됩니다.

하안거라 하면 여름철에 스님들이 무더위와 장맛비를 피해 처소에 들어앉아 참선에 전념하는 것을 이르는 것이지요. 바깥으로 나돌아 다니다가는 계절적으로 번성하는 벌레들을 자칫 해하기 쉬우므로 이를 피한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합니다. 따라서 보통은 엄숙한 분위기를 떠올리기 마련이련만 삼광사의 경우는 신도들의 왕래로 오히려 분주하게만 느껴집니다.
법회가 열리지 않더라도 기도처가 늘 개방되어 있기는 하지만 내달 초까지 진행되는 하안거는 아무래도 불공에 열성인 일반 신도들을 더 배려하기 위해 마련된 게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불자가 아니면서도 염치불고하고 예불에 열중하는 신도들 사이에 슬며시 끼어 앉았습니다. 한평생 죄업을 반복하는 똑같은 중생의 입장에서 그 정도야 눈빛으로 충분히 이해를 받을 수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러나 두 눈은 감았어도 흐트러진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가 않습니다. 손톱만한 세속의 물정에도 연연하면서 근심과 고뇌에서 훌쩍 벗어나고자 하는 자체가 지나친 욕심이 아니겠는지요. 워낙 미욱하고 조급한 성미 탓에 주변 사람들에게 번번이 걱정을 끼친다는 자괴감은 꼭 절을 찾았기에 떠오르는 생각만은 아닐 것입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쓸데없이 고집만 늘어간다는 자책도 들게 됩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판단을 그르치게 되는 것이 바로 그런 때문이겠지요. 비록 하늘을 우러러 떳떳하다고 내세우지는 못할망정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가며 살아왔다는 자부심에도 은근히 회의가 입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을 비우라는 가르침에 대해서는 그대로 따를 엄두가 나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세속에 찌든 속인에게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생각조차 새로운 번민이 되는 모양입니다. 눈을 감고 있을수록 마음이 가벼워지는 대신 자꾸 무거워지기만 합니다.

예불 도중 잠깐 절 마당에 나섰습니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저 밑으로 부산 시가지를 내려다봅니다. 주택가가 이어진 바로 아래쪽의 초읍동 지역은 물론 그 왼편으로 어린이대공원과 사직고개에서부터 저 멀리 해운대까지 훤하게 밝힌 야경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이미 밤이 깊은 시간이지만 자동차 경적에 도심 곳곳에서 서로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온갖 고함소리까지 고스란히 들려옵니다. 저마다 아직 잠들지 못하고 무엇엔가 미련을 보이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그러한 한밤의 경치와 소음이 마음을 다잡겠다면서도 흔들리기만 하는 속인의 의지를 더욱 유혹이라도 하는 듯이 잡아끄는 기세입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절 뒤편의 백양산을 올려다 봅니다. 산머리에는 어느샌가 짙은 밤안개가 둘러쳐졌고 그 위로는 희미하게나마 별들이 반짝입니다. 빽빽이 우거진 나무들도 각자의 형체를 잃고 어둠의 장막으로 가려져 버렸습니다.
어둠에 잠긴 수풀을 바라보다가 언젠가 동네 산책길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던 껍질뿐인 매미의 허물을 문득 기억에 떠올립니다. 무려 10년 안팎이나 애벌레로 땅속에서 지내다가 그렇게 허물을 벗고도 기껏 한 달밖에 채우지 못하는 게 또한 매미의 얄궂은 생태라지요.

그러고 보니, 귀가 따갑도록 들려오던 대낮의 매미 소리도 한결 뜸해진 것 같습니다. 밤중이라 매미도 나름대로 잠을 자려는 것일까요. 그 대신 가을 풀벌레들의 울음소리가 완연합니다. 어느덧 밤안개는 불빛이 주춤해진 도심의 언저리까지 내려앉고 있습니다. 독경소리가 잔잔하게 울려퍼지는 백양산의 여름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습니다.

출처 : 자유칼럼그룹(http://www.freecolum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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