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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600년의 역사 찾기

2013년 03월 12일 (화) 10:50:27

이병희 기자 정리

renews@renews.co.kr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인 기대승(奇大升)이 경기도 고양 지역과 밀접한 인연을 맺고 있었던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문 것 같습니다. 그 집안의 본관이 행주(幸州)인 데다 고봉(高峰)이라는 그의 호가 고양시에 위치한 고봉산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지금도 고양시 원당에 있는 덕양서원에는 그의 숭모비가 세워져 있고 뒷산에는 집안 조상들을 모신 행주 기씨 묘역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물론 기대승이 태어난 곳은 고양이 아니라 전라남도 나주입니다. 숙부인 기준(奇遵)이 조광조(趙光祖)와 더불어 도학정치를 꾀하다 실패하게 되었고 그 결과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아버지 기진(奇進)이 멸문지화를 염려한 나머지 식솔들을 이끌고 친척에 의탁해 피난해 있던 동안에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기씨 집안의 자손들이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퍼져나가게 되었지만 그 전까지는 고양 일대가 근거지였던 것입니다.

기대승이 호로 끌어썼던 고봉산도 역사적으로 유서가 깊은 곳입니다. 일찍이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각축지로서 개백현(皆伯縣)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하지요. 고봉이라는 이름이 등장한 것은 통일신라 시기인 8세기 중반이었고,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조선 개국 초에 전국적인 행정구역 개편으로 고봉과 덕양이 합쳐지면서 지금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태종실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정확히 600년 전인 1413년의 일입니다.

요즘 고양시 당국과 주민들은 600년 역사를 되살리기에 분주합니다. 퇴계 이황(李滉)에 필적할 만큼 사유와 논리가 뛰어났던 기대승의 일화와 삼국의 병사들이 산자락을 오르내리며 싸움을 벌이던 고봉산의 역사를 통해 지역적 정체성을 되찾자는 움직임입니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이던 1991년 신도시 아파트 입주가 시작되면서 일산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지만 고양이라는 원래의 이름이 훨씬 더 유서가 깊은 것은 물론입니다.

고양시의 역사를 되살리려는 노력 가운데서도 가장 돋보이는 것은 벽제관(碧蹄館)을 복원하려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중국을 오가는 사신들이 한양에 들어가기 전에 쉬어가던 벽제역의 객관이 바로 벽제관이었습니다. 당시의 국제 관문이자 교통 중심지로서의 정체성을 나타낸다고 여겨집니다. 임진왜란 때 이 근처에서 명나라 군사와 왜군 사이에 대접전이 벌어질 만큼 요충으로 꼽히던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현재 벽제관이 옛터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원래 육각정이 세워져 있었으나 일제 식민지 당시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총독이 제멋대로 뜯어다가 자신의 고향인 야마구치(山口)현 이와쿠니(岩國)시로 옮겨갔기 때문입니다. 최근 고양시청 대표들이 일본 현지를 방문해 그곳 공원에 세워져 있는 정자를 돌려주도록 정식으로 요청을 해놓은 상태입니다. 문화재청에 대해서도 벽제관을 옛 모습대로 복원해줄 것을 건의하고 있습니다.

고양시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은 북한산성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과 함께 현재 북한산 등성이에 주춧돌만 남아 있는 신영루의 복원으로까지 확대되고 있습니다. 역시 기단석만 흩어져 있는 북한산 행궁터에 대한 기초조사 작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북한산의 가장 넓은 면적을 고양시가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일반에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움직임이 아니라도 고양시에서는 여러 역사적인 자취와 흔적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행주산성 정상에 세워져 있는 행주대첩비가 그 하나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권율 장군과 주민들에 의한 혈투의 교훈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대가로 꼽히는 송강 정철을 기리는 송강문학제도 해마다 열립니다. 그가 부모상을 당하여 이곳에서 시묘살이를 했던 인연에 의한 것입니다.

하지만 고양시에서는 아무래도 신도시인 일산의 비중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100만명에 이르는 주민들 대부분이 외지에서 흘러들어온 처지이기에 과거의 역사보다는 현재의 도시적인 생활상이 더 관심을 끌고 있는 것입니다. 호수공원을 비롯하여 노래하는 분수대, 꽃박람회, 킨텍스가 그렇습니다. 한류월드에는 공연장과 테마파크, 호텔 등이 세워지고 있는 데다 몇해 안으로 1만8000석 규모의 대형 케이팝 공연장까지 들어서도록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문화적 활동이 활발할수록 역사적인 배경은 더욱 필요합니다. 여러 지역별로 신도시가 확대되는 추세라는 점에서 주민들의 지역적 소속감이 희미할 뿐 아니라 이웃 간에도 웬만해선 대화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도 서로가 마음을 터놓기보다는 은근히 경계하는 사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지역사회에 대한 애착심과 역사적 동질감이 배제된 채 소비적인 문화가 활개치고 있는 결과입니다.

따라서 급속한 성장과정에서 잃어버린 도시의 정체성을 찾아내야 합니다. 억지로 꿰어맞출 필요까지야 없겠으나 기왕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라면 새로운 시각으로 되살릴 필요가 있습니다. 주민들이 아파트 평수만을 좇아 떠돌아다니는 입장이 아니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역사적 동질감의 회복은 이러한 ‘떠돌이 도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것입니다. 고양시의 역사찾기 사례가 전국적으로 확대되기를 기대하는 이유입니다.

출처 : 자유칼럼그룹(http://www.freecolum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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