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지난 주 강릉 시내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다가 일반국도로 방향을 틀었다. 강릉시 구정면 어단리를 가기 위해서다. 그곳에는 유명한 커피 공장이 있고, 평소 자랑을 많이 듣던 과수원이 있기 때문이었다. 관동대학교 네거리를 지나자 도로변 가로수를 휘감고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오렌지색 꽃들이 눈에 한 아름 들어왔다. 꽃이 예쁘다고 사진을 찍자는 아내의 제안에 잠시 차를 멈췄다. 그 꽃은 다름 아닌 능소화(凌宵花)였다. 중국이 원산지인 이 꽃은 금등화(金藤花)라고도 한다. 옛날에는 양반집 마당에만 심었다고 해서 '양반 꽃'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기품 있고 아름다운 꽃이라는 의미다.

"(능)소화는 기품이 넘치는 아름다운 꽃입니다. 원래 이세상의 꽃이 아니라 하늘의 꽃이라고 합니다. 하늘정원에 있던 꽃을 누군가가 훔쳐 인간세상으로 달아났다고 합니다......우리나라에서도 궁궐과 양반가에서 그 꽃을 심고 즐겨온 것이 수 백 년이옵니다."

 임진왜란의 전쟁포로 이야기와 정유재란 당시 조선에 주둔 했던 일본군 지휘관의 시선으로 전쟁을 바라본 <도모유키>로 이름을 날린 조두진의 소설 <능소화>에는 꽃에 얽힌 애절한 이야기가 전설처럼 흐른다.

 도로변 가로수에 매달려 이글거리는 태양아래 살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기품 있는 능소화(凌宵花)- 소설은 능소화를 둘러싼 애절한 사연을 구구절절 담고 있다.
"그 꽃에는 독이 있다네. 냄새를 맡으면 정신을 잃고 그 꽃을 만진 손으로 눈을 비비면 실명한다네."
"이렇게 고운 꽃에 독이 있다니. 그 참....." 이 사람은 바로 조선 명종 때의 인물 이응태(1556-1586)다. 소설에는 그의 아내 여의가 하늘나라에서 '소화'를 훔쳐 달아났다고 묘사되어있고, 그의 남편 이응태가 하늘정원 지킴이 팔목수라(八目修羅: 눈이 여덟 개 달린 신)로 부터 벌을 받아서 30세의 나이에 요절한 것으로 쓰여 있다. 1998년 안동시 산기슭에서 이응태의 무덤이 발견되었고, 그의 무덤에는 부인이 쓴 편지가 들어있었다고 한다. 이름 하여 '400년 전에 부친 편지'다.

<담 안팎에 어제 심은 '소화'의 이름을 '능소화(凌宵花)'라 하였습니다. 하늘을 능히 이기는 꽃이라 제가 이름을 지었습니다......바람이 불어 봄꽃이 피고 진 다음, 다른 꽃들이 더 이상 피지 않을 때 능소화(凌宵花)는 붉고 큰 꽃망울을 터뜨려 당신을 기다릴 것입니다.>
 하늘정원에서 지상으로 훔쳐온 '소화'가 하늘을 거스르는 '능소화'가 된 것도 이러한 곡절이 있었다. 실제와는 다르겠지만, 그럴 법한 작가의 설정이다. 꽃이 너무나 아름다워서다.

 능소화는 줄기에 흡착근이 있어 벽이나 나무를 감고 올라간다. 7∼8월에 피는 능소화는 지금이 한창이다. 그러나 '이 꽃은 죽은 나무를 좋아한다'는 말도 있다. 물론, 소설 속의 암시다.
"이 꽃나무는 죽은 나무를 좋아합니다. 죽은 나무아래 능소화를 심으면 덩굴이 죽은 나무   줄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아름다운 꽃을 피웁니다."

 그래서 일까? 일본 나고야 이누야마(犬山) 성에는 죽은 나무에 능소화가 피어 있다. 이 성(城)에는 수령 650년의 고목이 있었다. 성 축성과 함께 영겁의 세월을 지켜온 이 나무를 사람들은 신목(神木)이라고 했다. 그런데, 나이 탓인지 그 신목이 죽음을 맞았다. 신목이 죽자 시민들은 나무를 베지 않고 보호대 같은 큰 틀을 씌우고, 그 밑에 능소화를 심었다. 요즈음 능소화가 만발하여 성을 찾는 이들의 마음을 즐겁게 한다. 나무를 사랑하는 마음이 존경으로 이어져 고목의 시신(?)을 모시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능소화를 '살아있는 나무 밑에 심으면 산 나무가 죽는다'고 한다. 능소화가 가로수를 휘감고 올라가 나무 허리마다 꽃바구니를 매달고 있는 형상이 기발하기도 했지만, 나무가 겪을 괴로움도 클 듯싶다.
능소화(凌宵花)는 꽃의 형태가 나팔을 닮아 서양에서는 '트럼펫 플라워'라고 불린다. 능소화에는 이렇듯 갖가지 사연들이 가득 담겨져 있다. 하물며, 인간의 삶에는 얼마나 많은 일들이 얽히고 설키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