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가 소록도(小鹿島)에서 베토벤의 '운명'을 연주했다는 뉴스를 접하고 관심을 같던 차, 때마침 그 곳을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일본에서 유자막걸리 수입차 한국에 온 '이치무라 사카에(市村?)' 씨, '미야자키 게이지(宮崎敬士)' 씨, '이토 슌이치(伊藤俊一)' 씨와 함께 고흥에 갔기 때문이다.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 소록도리에 있는 섬 소록도(小鹿島)- 이름만으로는 얼마나 아름다운 섬인가. 섬의 형상이 '작은(小) 사슴(鹿)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소록도와 관련한 유명한 시가 있다. <전라도 길>이라는 한하운의 시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생각만으로도 눈물이 핑 돈다. 머나먼 길. 발가락 잃으면서 가야할 길. 참으로 야속한 운명의 길이다. 그러한 길을 필자 일행은 비행기로 훌쩍 사치스럽게 갔다. 사람과 배와 생선들이 뒤섞인 녹동 항에서 바라본 소록도는 한 폭의 동양화였다.

 소록도는 더 이상 배를 타고 가는 섬이 아니라 다리로 건넌다. 2009년 3월 3일에 개통된 다리가 있어서다. 필자 일행은 차를 타고 다리를 건너서 소록도로 들어갔다. 입구에서부터 검문을 받고 사전 승인을 받은 절차에 의해서 섬에 발을 디뎠다. 일본인들은 물론, 필자도 처음 밟는 곳이었다. '허용된 구역만 다녀야 한다'는 직원의 설명이 있었다. 우리는 해안선 송림을 지나 병원 건물을 끼고 중앙공원으로 들어갔다. 입구에 서 있는 안내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1916년 조선총독부가 주민들의 민원에 의해 소록도 자혜병원으로 문을 열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 한센병 환자들을 강제로 분리하여 수용하기 위한 시설로 사용되었다."

일본인들도 처음 접한 사실에 고개를 끄덕였다.
 공원 안으로 들어서자 시원스러운 조경이 긴장된 마음의 벽을 헐게 했다. 일본, 대만, 필리핀 등에서 건너온 수많은 정원수로 가득 찬 깔끔한 공원이었다.
 성당 앞 출입금지 구역에서 머뭇거리자 초라한 모습의 할아버지 한 분이 다가왔다. 행색으로 보아 병이 완쾌되었으나 마땅히 갈 곳이 없어 공원지기를 하는 듯 했다. 균형을 잃은 할아버지의 얼굴 모습에 모두들 화들짝 놀랐다.

"어디서 오셨는지요?"
"일본에서 오신 손님들을 모시고 왔습니다."
갑자기 할아버지의 눈이 크게 떠지더니 유창한 일본어가 쏟아져 나왔다.
"아-그렇습니까? 잘 오셨습니다. 저는 소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일본에서 다녔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일본 오이타(大分) 고교를 졸업하고 해방 후 한국에 돌아왔으나, 운 나쁘게 몹쓸 병이 걸려서 여기가지 왔다고 했다. 일본 사람들도 반가운 표정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그 시절 일본에 유학을 갔었다면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그를 이곳에 버리고 말았다. 그는 자칭 '등단한 시인'이라면서 자신이 지은 시를 암송했다.

"철조망에 갇혀/ 하늘과 바다와/ 구름과 새들을 벗 삼아/ 목숨을 이어온 수 십 년/ 구름에 물어볼까? /새들에게 물어볼까?/ 내 고향 부모 형제 보고 싶은 얼굴들...."
 필자가 정확하게 메모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한(恨)을 담은 넋두리 같은 시였다. 필자는 물론, 일본인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일본에서 온 말동무가 반가웠던 할아버지- 헤어지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는 할아버지를 뒤로하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실상은 이 섬 전체가 커다란 한(恨)의 덩어리가 아니겠습니까? 철조망을 넘어서면 환자도 건강인도 드나들지 않는 바로 그 망각의 완충지대서부터 시작해서......" 소록도를 주제로 한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의 한 대목이 바람처럼 스쳐갔다. 필자 일행은 '한(恨)의 덩어리'를 뒤로하고 서울을 향해 줄달음쳤다. 귀경 길 내내 할아버지의 자작시가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뜨거운 7월이다. '숨 막히는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릴 태세다. 아무리 더워도 짜증을 내지 말아야겠다. '건강한 모습으로 땀 흘리면서 살고 있다'는 그 자체가 '신의 축복'이라는 생각에서다. 소록도(小鹿島)에서 터득한 또 하나의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