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전에서의 승리에 너무 도취되었던 때문일까? 우리의 기대가 너무 높았던 것 같다. 월드 컵 16강을 향한 아르헨티나와의 경기는 '세계의 벽이 실로 높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인식 시켜 주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지난 17일. 서울 거리는 하루 종일 긴장과 기대로 술렁거렸었다. 출근길부터 붉은 티셔츠 차림의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었고, 삼삼오오 온통 축구이야기였다. 거리마다 '가자! 16강으로- 우리의 태극전사'라는 현수막이 유월 바람에 뜨겁게 펄럭였다. 퇴근 시간이 되자 사람들도, 차량들도 어디론가 줄달음쳤다. 축구 중계가 시작되는 저녁 8시 30분에 눈을 맞추기 위해서다. 특히, 젊은이들의 발길이 더욱 바빴다. 그리스와의 시합 때는 비가 내렸었지만, 이날은 날씨도 좋았다. 서울광장, 여의도 강변, 가릴 것 없이 사람들의 물결이 넘쳐났다. 8시 30분- 5000만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월계수는 영원하리라.
 우리가 승리하는 방법을 아는 것은
 우리가 승리하는 방법을 아는 것은
 영광스런 보답을 받고 사는 것이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맹세하리."

 경기 시작 전 연주되는 아르헨티나의 국가부터 마음에 걸렸다. 특히, '우리가 승리하는 방법을 아는 것은 영광스런 보답을 받고 사는 것이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맹세하리'의 후렴이 더욱 그러했다.
 그들의 국가(國歌)처럼 아르헨티나는 '승리하는 방법'을 알았다. 죽음까지는 맹세하지 않았겠지만 승리를 아는 선수들의 개인기는 물론 감독의 전술도 뛰어났다. 아르헨티나는 그동안 우리의 생각 속에서 그리던 그림과는 너무나 달랐다. 그들은 모든 부분에서 우리를 압도했다. 경기 내내 6:4 정도의 볼 점유율을 유지하면서 한껏 여유를 부렸다. 정성룡 선수의 선방도 어쩔 수 없었다. 4:1이라는 스코어는 우승후보로서의 위용을 유감없이 과시한 화려한 성적표였다. 우리도 잘 했지만 그들은 더 잘했다. 상대가 너무나 강했던 것이다.
 승리한 '마라도나' 감독은 기자 회견장에서 "우린 한 번도 한국을 걱정한 적이 없다. 오늘 경기에서 한국은 단 한 번도 경기의 흐름을 통제하지 못했다"며, "한국이 우리보다 나으려면 우리가 실수하기만을 기다리는 것 뿐 이었다"고 으쓱댔다. 얄미운 말이지만 승자의 입을 봉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항상 승자의 편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입에 침이 마르도록 한국 팀을 칭찬하던 외신들도 실망어린 기사를 쏟아냈다.

 "특유의 기세를 발휘하지 못했고, 시종일관 상대의 공격에 압도당했다"는 어느 외신의 지적이 가슴에 와 닿는다. 외신들도 우리만이 지니고 있는 '한국인 특유의 기세'를 기대했을 것이다.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어떠한 어려움도 헤쳐 나갈 수 있는 국민이다. 어려울 때 더욱 뭉치는 훌륭한 DNA를 가지고 있다. 반도라는 지정학적 조건으로 인해 대륙과 바다 사이에서 도전과 압력을 끊임없이 받아왔으나 이렇게 당당히 살아남아 세계 속에 우뚝 섰다. 붉은 티셔츠를 입고 거리에 나가 응원전을 펼치는 나라는 지구상 그 어디에도 없다. 이것이 바로 '한국인 특유의 기세'다.

 스포츠는 이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지더라도 당당하게 질 수 있어야 한다. 16강 진출을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한 태극전사들의 투혼에 박수를 보낸다. 더불어 축구를 통해 하나로 된 국민들의 마음이 오랫동안 지속되기를 바란다. 남한은 물론 북한까지도 말이다.
 "언어가 아닌 것을/ 주고받으면서/ 이토록 치열할 수 있을까/ 침묵과 비명만이/ 극치의 힘이 되는/ 운동장에 가득히 쓴 눈부신 시 한편/ 90분 동안/ 이 지상에는 오직 발이라는/ 이상한 동물들이 살고 있음을 보았다."
문정희(1947- ) 시인의 <축구>라는 시(詩)다. '운동장에 가득히 쓴 눈부신 시 한편'이 기다려진다.
'대∼한민국-' 축구를 넘어 정치도, 경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