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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안개 낀 가을에 만났던 그녀......
2023년 01월 20일 (금) 12:18:10 박영 작가 renews@renews.co.kr
   
(사진: 박영 작가)

아침에 영화배우 윤정희씨의 별세 소식을 접했다. 얼마 전부터 뉴스로 전해지는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마음이 아프고 우울했었다. 그녀가 알츠하이머성 치매에 걸려 파리 근교에서 외롭게 지내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렇게 아름답던 그녀가....물론 아름다운 사람이라 해서 치매에 걸리지 말란 법은 없지만 나는 마음이 아득해졌었다. 마치 비현실속의 그녀 모습같았다. 그런데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2023년 1월 19일 파리에서.

그녀의 마지막 영화 “시”에서 70대의 여배우가 얼굴을 전혀 손대지 않고 본인의 나이 그대로의 모습이어서 좀 놀랐다. 물론 이 영화는 치매노인이 주인공이지만 그 전후에도 윤정희여사는 얼굴을 젊게 보이도록 관리(?)하지 않았었다. 그러니까 인위적으로 젊음과 아름다움을 만들려 하지 않았었다. 여배우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나이들어가는 그녀의 얼굴을, 할머니의 얼굴인 그녀를 여기저기에서 발견할 수가 있다. 오늘 그녀의 별세 소식을 전하는 뉴스에서 보여지는 그녀의 사진들은 얼굴에 잔주름이 가득한 나이든 여배우의 모습이다.

나는 그녀와 서울에서 특별한 친분이 있었던 건 아니다.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고신성일선생님께서 내가 파리에 간다고 하니까 윤정희여사의 전화번호를 주시면서 “내가 소개했다고 하면 밥도 사주고 편의도 봐 줄거야. 전화해.” 하셔서 파리에서의 일이 대충 끝나갈 무렵 나는 윤정희여사에게 전화를 했다.

그야말로 파리에서 만난 것이 첫 대면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스스럼없이 나와 주었고 오래전부터 알던 사람처럼 나를 대해주었다. 물론 신성일 이라는 믿을만한 분의 소개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파리에서 윤정희여사를 만난 날은 안개가 자욱한 가을날이었다. 뜻밖에도 그녀는 중학생인 딸과 함께 나왔다. “여기는 퇴교할 때 부모가 데리러 가야하거든요. 지하철을 타고 다니니 얘를 집에 데려다 주고 오기엔 약속시간에 늦고, 해서 함께 나왔어요.” 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속으로는 미소짓고 있었다. 함께 나온 딸이 세상이 다 인정하는 미녀배우 엄마는 닮은데가 전혀 없어 보이고 아빠인 백건우 피아니스트와 붕어빵이었기 때문이다. 두루뭉실한 몸의 분위기도 똑 같고 말이 없어 무뚝뚝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윤정희여사가 “아이, 너 춥겠다.” 하면서 자신의 목에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끌러 딸의 목에 매주었다. 그래도 묵묵. 표정이 없는 따님. 암튼 우리 세 사람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인도식당에 가서 저녁식사를 하고 바이올린 독주회에 갔던 기억이 난다. 그녀와 딸은 연주에 관한 얘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나는 클래식음악에 문외한이니 알아듣지 못했다. 윤정희여사 모녀는 서로 존중하고 신뢰하는 친구같은 모녀로 느껴졌다. 그녀는 시종 따뜻한 눈으로 딸을 보면서 얘기하고 있었다. 어느 어머니도 다 마찬가지이겠지만 그녀의 딸에 대한 애정이 넘치게 느껴졌다.

나는 그 하루 동안 윤정희여사를 가까이 대하면서 참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인이구나, 그리고 지혜롭고 현명한 여성이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다. 어떤 스타나 연예인처럼 누군가에 대한 친절이 일회성으로 느껴지거나 매너만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 읽고 있는 책이나 관심사에 대한 얘기를 했던 것 같다. 대스타인 여배우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중년여인의 모습이어서 참 따뜻했다. 그녀는 항상 사람을 진정으로 대하는 사람이구나, 그러지 않을 상대라면 아예 관계를 만들지 않겠구나, 하고 나는 내멋대로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 후 서울을 방문했다기에 여의도 63빌딩 레스토랑인가, 카페에선가 다시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때 나눈 얘기 중에 기억에 남는 내용은 그녀가 어머니가 되는 일은 정말 생에서 가장 멋진 일이라고 했던 말이다. “응. 아이, 아이를 갖는 건 정말 좋아. 꼭 아이를 낳아요.” 했었다. 그날도 우리는 영화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여자로 사는 일, 사랑, 등에 관한 얘기를 주고받았던 것 같다. 그리고 어느 해 신라호텔 바에서 엄앵란, 문희여사와 신성일선생님과 함께 윤정희여사를 다시 만나서 담소를 나누었던 기억이 있다. 신성일선생님과 윤정희여사는 매우 친밀한 사이였다. 신성일선생님은 무슨일이든 그녀의 의논 상대가 돼주는 것 같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깊은 신뢰가 있어 보였다. 배우선배인 엄앵란여사보다 신성일선생님과 더 친한 것이 내게는 좀 의외였다.

그 몇년 후에는 연말 대종상 시상식 직전에 신성일선생님과 그녀와 셋이서 잠깐 만났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윤정희여사는 친정과 동생들에게도 버팀목이 되어주고 예술가 남편을 케어하면서 돕고 딸에게 다정한 엄마였다. 이렇게 말하면 “그게 뭐, 다 그렇게 살지.” 할지도 모르지만 배우가 되고 정상에 오르고 유명예술가와 결혼을 하고, 그리고 자신의 일인 연기를 재개하고, 이련 일들이 그녀의 삶에서 평범한 여정이었을까? 싶다.

너무나 열심히 살고 진정한 사람의 관계를 지향하는 그런 사람, 윤정희여사가 딸도 못알아볼 정도로 병이 깊다고 해서 현실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었는데 오늘 별세 소식을 듣고 있다.

아름다움도 진실도 영광의 빛도 다 스러져 가는 것이다. 너무나 쓸쓸한 일이다. 

[박영(朴怜)은 TV 및 라디오 드라마 작가다. 대표작으로 MBC TV 드라마 ‘사랑의 계절’, 시추에이션드라마 ‘알뜰가족’, KBS 라디오 ‘대공수사실록’ 등이 있다. 장편소설도 출간했다. ‘정오의 탈선’ ‘김마리라는 부인’(영화화 됨), ‘내일은 천국이고 싶다 ’ ‘러브어게인’ ‘동경에서 서울까지’ ‘해피 투게더’ 등이다. 그 외 신문, 잡지 등의 매체 기고가로 활동했다. 해외에서 이브 몽땅(배우, 가수). 도이 다카코(일본 사회당 당수). 루이제 린저(독일 작가). 등을 인터뷰했고, 국내에서는 정·재계 및 예술인들을 다수 인터뷰했다. 편집자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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