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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했다고 한 번만 빌어라’는 히데요시 거부하고 할복한 센노리큐 “당신은 내 다도를 범접 못한다”
2018년 02월 19일 (월) 09:41:29 장상인 발행인 renews@renews.co.kr
   
말차를 대나무 막대로 저어 거품을 내는 일본 여성.

국경선을 의미하는 사카이(堺)를 다녀왔다. 오사카(大阪)와 맞닿아 있는 항구도시이다. 일찍부터 개방된 곳으로 일본의 봉건적인 무인(武人)정치가 뿌리를 내린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1336-1573)에 자치적 도시로 발전했었다. 포르투갈·스페인·조선·명나라 등과 무역으로 크게 번성했던 도시이기도 하다. 굳이 우리와의 역사적 관련성을 찾는다면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했던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558-1600)가 사카이(堺) 무역상 고니시 류사(小西隆佐, ? -1592)의 아들이라는 점이다. 유키나가(行長)의 아버지는 당시 무역상으로 이름을 날렸던 사카이 지역의 호상(豪商)이며,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1537-1598)의 측근이었다.

유키나가는 어린 시절에 기독교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아우구스치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신임을 받아서 규슈 우도(宇土)의 14만 6000석 영주로 우뚝 섰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인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1560-1600)편에 서서 싸웠으나 동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1616)에게 패해서 교토에서 참수 당했다.
 
차 마시기 전 먹는 과자에 담긴 사계절
 

   
사카이 지역에서 출토된 조선 다완.

사카이 출신의 걸출한 인물은 또 있다. 다름 아닌 다인(茶人) 센노리큐(千利休, 1522-1591)이다. 그는 일본의 다도(茶道)를 정립한 실존 인물이다. 다도는 다실을 꾸미고 여러 도구를 준비해서 차를 마시면서 대화하는 모든 과정을 일컫는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문화를 창출해낸 그를 차의 원조(茶祖)라 부른다. 특히 검소·수심·한가로운 정취의 뜻을 지닌 와비차(わび茶/侘茶)를 완성시킨 사람이다. 그는 차를 통해 조화와 존경, 맑음과 부동심을 의미하는 화경청적(和敬淸寂)의 정신을 강조했다. 후루룩 마시는 행위를 뛰어넘어 예의범절을 갖춘 다도를 정립한 것이다.
 
리큐의 어릴 적 이름은 다나카 요시로(田中與四郞). 그는 어려서부터 어깨 너머로 차를 배우기 시작해 17세 때부터 기타무키 도친(北向道陳, 1504-1561)을 스승으로 모시고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후일 도친(道陳)의 소개로 다케노 조오(武野紹鷗, 1504-1561)의 문하생이 됐다. 일본의 다도는 중국에서 한반도를 거쳐 전래된 것으로 차를 가루 형태(抹茶)로 다기(茶器)에 넣어 뜨거운 물을 붓고, 대나무로 된 막대로 저어서 거품을 내서 마시는 형태를 기본으로 했다. 더불어 차의 작법은 물론 예의와 전통적 문화를 토대로 했던 것이다. 일본에선 다도를 신부 수업을 위한 필수적 과정으로 여기기도 하며, 어린 아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배우는 전통으로 이어가고 있다. 다도를 즐기는 가정주부 이토 미나(伊藤美奈·58)의 말을 들어봤다.
 
“일본에는 문화와 매너를 배우는 몇 가지 법도가 있습니다. 다도, 꽃꽂이, 서예, 무도 등입니다. 그중에서 다도는 종합적인 일본문화로서 여자들에게 인기가 높습니다. 다도에서는 도코노마(床の間: 방바닥보다 한 층 높게 만든 곳)와 화병에 꽂힌 꽃을 눈으로 보고, 벽에 걸린 족자를 보면서 사계절을 즐깁니다. 차를 마시기 전의 과자도 사계절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차를 마시기 전에 먹는 과자.

우리나라에서 13년째 우라센케(裏千家) 차를 연구하고 있는 최정순(65)씨도 “일본의 다도는 섬세하고 정확하며 구도자와 같은 진지함이 있다”면서 “다도에는 정치색이 없다. 평화를 추구하는 순수한 문화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다도 문화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센노리큐의 다실에서는 작은 족자 하나와 꽃 한 송이가 꽂힌 화병 이외엔 아무 장식이 없는 작고 수수한 다다미 2장과, 소박하면서도 기품 있는 다기로 즐기는 문화적 행위를 펼쳤다. 리큐의 생가 터는 그러한 그의 다실이 연상될 만큼 작고 소박했다. 필자를 안내한 자원봉사자 히가키 유키오(檜垣幸男·66)는 리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리큐는 미의식 추구를 바탕으로 차 내리기의 의례적인 측면, 차 모임의 진행순서, 가이세키(會席)요리 등을 양식화하여 다도를 확립했습니다. 리큐의 가르침을 토대로 그의 자손들은 우리센케(裏千家), 오모테센케(表千家), 뮤샤노고지센케(武者小路千家) 등 세 가문으로 나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선조가 완성한 다도를 계승하고 있습니다.”

   
센노리큐 생가터의 우물.

리큐 생가의 건너편에 있는 기념관에서는 사카이의 무역거래와 센노리큐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필자는 전시관을 돌아보면서 한국·중국·일본 차 문화의 차이를 떠올려 봤다. 세 나라의 차 문화를 살펴 볼 때 우리나라는 문예다도(文藝茶道), 중국은 음예다도(飮藝茶道), 일본은 무예다도(武藝茶道)로 특정지어진다. 한국은 차의 철학성을 중시하는 반면, 중국은 차의 종류와 마실 거리에 관심을 두고 있고, 일본은 차의 기예에 치중하는 특징이 있다(다도철학/정영선).
 
일본의 차는 특히 의식을 중시한다. 또 이 지역에서 출토된 조선의 다완과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를 보면 차와 도자기의 불가분의 관계, 한중일의 각기 다른 도자기 특징을 알 수 있다. 중국산 도자기는 지나치게 화려하여 소박한 미를 추구하는 일본 다도에 적절하지 않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조선 도자기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당시 조선 도공들을 납치하고 조선 백자를 수집하는 데에 열중했다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한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는 조선의 ‘도자기를 빼앗아 가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도공(陶工)들을 몽땅 일본으로 붙잡아 오도록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의 명(命)에 의해 규슈(九州)와 시코쿠(四國) 출신의 다이묘(大名)들은 앞을 다투어 도공들을 일본으로 연행했다. 그 후 사쓰마야키(薩摩燒), 아리타야키(有田燒), 하기야키(萩燒), 다카토리야키(高取燒) 등에서 꽃을 피워 오늘날 일본의 도자기 문화를 이끌고 있다.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전쟁은  일본의 도자기 산업(窯業)을 부흥시키는 토대를 만들었다.

하극상의 뿌리로 차 스승 리큐를 지목

   
센노리큐의 초상화(위 사진). 아래는 무로마치 시대 서구와 무역했던 무역선.

기념관에서 리큐를 담당하고 있는 직원 고마쓰 바라(小松原·43)는 <일본인 마음속의 어록 ‘센노리큐’>를 추천했다. 이 책에는 차의 접대에 대한 정의가 명쾌하게 내려져 있다. “좋은 물을 길어오고, 장작을 피우고, 그 위에 물을 끓여서 차를 우려내고 부처에 봉양하고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서 나도 마신다.”
 
또 다른 책 야마모토 겐이치(山本兼一)의 소설 『리큐에게 물어라』에는 두 사람의 관계가 드라마틱하게 드러나 있다. “내가 그런 천박한 사내와 관계한 건 어리석었다.” 천박한 사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다. 리큐는 히데요시(秀吉)를 그만큼 인정하지 않았다. 소설은 허구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썼다. 다시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본다.
 
“내 일생은 그저 한 잔의 차(茶)를 정적 속에서 즐기는 일에만 부심해 왔다. 이 천지에 살아있는 지복을 차 한 잔으로 맛 볼 수 있도록 고안을 거듭해 왔다. 미(美)의 심연을 보여주어 그 거만한 사내의 콧대를 꺾어주고 싶다.”
 
결국 리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로터 자결을 명(命)받아 자택에서 할복했다. 1591년 2월 28일의 일이다. 리큐는 잘못했다고 한 번만 빌면 살려주겠다는 히데요시(秀吉)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하고 죽음을 택했다. 자격이 없는 권력자에 대한 속절없는 아부가 싫었기 때문이다. “70년 나의 다도는 천하를 틀어쥔 권력자라 할지라도 범접하지 못할 것이다.”
 
권력자의 주변에서 생각 없이 맴돌다가 오욕(汚辱)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는 이 시대의 사람들을 보면 427년 전 리큐의 기개(氣槪)가 차라리 돋보인다. 그가 남긴 글이 섬뜩하기도 하나, 뒤집어 보면 깊은 뜻이 내재해 있다. “인생 70. 깨달은 바와 같이 그러하구나! 나를 고뇌하게 하던 조상도 부처도 모두 필요 없는 세계가 되니, 지혜의 칼로 죽어 해탈한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사회적으로 만연된 하극상(下剋上)의 뿌리를 뽑기 위해서 부심했다. 그는 하극상이 문화에도 있다고 보고 자신의 차 스승이기도한 리큐를 지목했다. 리큐가 기존의 질서를 부정하고 새로운 가치창조를 주창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당대 문화계의 블랙리스트일 듯싶다.
 
피도 눈물도 없는 권력자의 ‘분노’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세네카(B. C 47-A. D 65)는 <인생론>에서 ‘분노’를 ‘짧은 광기’라고 했다. ‘광기’는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정의도, 진리도 던져버리는 무분별한 행동으로 치닫기 때문이다. 다도가 추구하는 것은 정신을 맑게 하며 집중력을 키워주고, 사고(思考)의 폭을 넓혀주는 것이다. ‘분노와 광기’를 혐오한다. 센노리큐의 말은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천하를 움직이는 것은 무력과 금전만이 아니다. 아름다운 것에도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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