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화한 날씨 속에 한 해가 끝을 향해 이울어 가고, 낙엽들이 허둥지둥 달려가고, 알아채지도 못하는 사이에 낮의 밝음이 희미해지고, 가로등이 매일 저녁 어제보다 약간 더 일찍 켜지는 때에...곤혹스러워하던 것이 다 풀리고, 모든 수수께끼가 해결되고, 모든 질문에 답이 나오고...”

2005년 맨부커 상 수상 작가 ‘존 밴빌(John Banville)’의 장편소설 <바다/The Sea>의 한 대목을 떠올려본다. 낙엽들이 허둥지둥 달려가고, 낮의 밝음이 희미해지는 것을 보면서.

더불어 5차에 걸쳐 진행된 촛불 집회에 ‘연인원 400만 명 이상이 함께했다’는 언론보도에 눈을 맞추며 모든 수수께끼가 해결되고, 모든 질문에 답이 나오기를 학수고대(鶴首苦待)해본다. 온 국민이 ‘최순실 게이트’에 함몰(陷沒)한 것 같아서다.

필자 역시 400만 명의 군중 속에 단 한차례 비집고 들어간 적이 있다. 구호를 외치며 참여한 것이 아니라, 현장의 생동감 있는 분위기를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현장의 분위기는 과연 달랐다. TV나 신문기사에서 본 것과는 판이하게.

광화문 촛불집회(1)

필자가 그들의 대열에 오랫동안 합류할 수 없었으나 군중 속에서 빠져나오는 데만 족히 한 시간 쯤 걸렸다. 노도처럼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상황이 상항이어서 이미 고인이 된 ‘앨버트 O. 허시먼(Albert O. Hirschman, 1915-2012)’의 저서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강명구 譯)를 다시금 펼쳤다.

“망해가는 기업 경영진의 무능력과 방치...권력의 소유자를 잔학함이나 나약함에 빠져들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하다. 권력의 무능과 부실행정보다는 개인 권리의 침해 같은 권력 남용의 위험이었다.”

허시먼(Hirschman)은 책에서 ‘이탈(離脫)’과 ‘항의(抗議)’의 개념을 제시했다. 이탈은 경제적 영역, 항의는 정치적 영역이라고.

“항의는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로 있기보다는 상황을 바꾸려는 모든 시도로서,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경영진(최고책임자)에게 개인적인 혹은 집단적으로 청원하는 방법이 있고, 변화를 끌어내기 위해 더 높은 기관에 호소하는 방법도 있으며 여론 동원을 포함한 그 외의 다양한 방법도 있다.”

광화문 촛불집회(2)

추운 날씨도 아랑곳하지 않고 광장과 거리에 집결하는 군중들은 더 높은 기관에 호소할 방법이 없어서 여론 동원을 통해 항의를 하는 것일까.

충성심, 항의를 활성화한다?

“충성심은 이탈 방식을 궁지에 몰아넣고 항의 방식을 활성화 시킨다...‘옳으나 그르나 내 조국’이라는 충성심의 패러다임은 ‘내 조국’이 계속 나쁜 일만 행하면 분명 말이 안 된다.”

이 말의 의미는 ‘내 조국이 좀 잘못 나가더라도 결국에는 다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기대가 함축돼 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옳으나 그르나 내 조국-

허시먼(Hirschman)이 쓴 책의 제목처럼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를 고민하면서도 분명 남아야할 조국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