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복이자 입추가 지나자 햇볕과 바람결이 달라졌다. 선인(先人)들의 절기달력이 신비스럽기 그지없다. 태풍 '나크리'와 '할롱'이 발버둥 쳐도 가을은 발 빠르게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가을이 오면 당연히 결혼 시즌에 돌입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말이 더 분주해진다.

필자는 지난 주말 한 신혼부부와 저녁 자리를 같이 했다. 필자가 주례를 섰던 관계로 결혼식 이야기가 꽃을 피웠다.

"손가락에 매니큐어(manicure)를 바르지 않고 봉숭아물을 들였네요? 요즈음 색시답지 않게...."

"아! 이거요? 제자들이 봉숭아에 백반을 넣고 찧어서 직접 제 손가락에 물을 들여 주었어요."

옆에 있던 필자의 아내와 새 신부가 나눈 대화다. 남녀 공학 고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여교사인 새색시가 봉숭아에 대한 수업을 하고나자, '학생들이 직접 선생님의 여린 손가락에 작품(?)을 만들었다'고 했다.

필자는 "교육은 직업이 아니라 하나의 자세이며, 선생과 청소년이 함께하는 동반자 관계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이 생각났다.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태들을 보면서 스승과 제자, 상관과 부하, 심지어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서 소멸돼 버렸던 '정(情)'이라는 단어가 소생(蘇生)된 느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손톱에 봉숭아꽃물을 들인다'는 말을 들어본지가 언제이던가!

순간 신경숙의 소설 <겨울우화>에 나오는 여인의 손톱이 연상됐다.

"여자의 손톱 끝에 남아 있는 봉숭아 꽃물이 붉다. 코트는 눈(雪)빛이고, 차창을 통해 들어온 겨울 햇살이 따뜻하고 은밀하게 여자를 감싼다."

봉숭아꽃과 함께 봉숭아로 물들인 손톱 끝에서 묻어나는 서민적이고 인간적인 여인의 모습을 떠올려 봤다.

봉숭아는 울타리나 화단 등에서 우리의 눈에 쉽게 들어오는 꽃이다. 이 꽃을 한자어로는 봉선화(鳳仙花)라고 한다. 꽃의 모양이 마치 봉황(鳳凰)처럼 생겼다는 이유에서다.

"옛사람들은 그 꽃을 보고 상서로운 새인 봉황의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그래서, 봉황의 봉(鳳)자로 꽃 이름을 지었습니다."

꽃 전문가로 통하는 기태완 박사의 저서 <꽃, 마주치다>에 들어 있는 봉숭아 이야기다. 더불어 기태완 박사는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이는 풍습에 대해서도 역사적 고증을 통해 명확하게 기술했다.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이는 염지(染指)는 동아시아에서 있었던 아녀자들의 오랜 풍습이었습니다. 그래서 봉숭아를 '염지갑초(染指甲草)'라고 하고, 또한 '아녀화'라고 합니다."

인도·말레이시아 등이 봉숭아의 원산지이니 충분히 납득이 가는 분석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 때 이미 이러한 풍습이 있었고, 조선 시대에는 단오 때 여성들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행해졌던 풍속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무리 일이 바쁘고 생활에 쫒기더라도 꽃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보자. 꽃과 마주치면 삶이 더 풍요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