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참으로 빠르다. 나이가 들수록 '세월은 더욱 빠른 걸음으로 달아난다'는 말이 새록새록 가슴에 와 닿는다.

세상이 시끄럽고 어지러워서인지 올해의 12월은 유난히 추워 보인다. 광화문 교보빌딩과 KT본사 사이의 바람은 높은 빌딩들 때문에 더욱 세차게 몰려왔다. 키 재기를 하는 듯 새로 세워지는 건축현장에서 들려오는 소음도 날카롭게 들렸다.

교보 빌딩으로 들어서는 순간 '박인환(1926-1956) 선생 집터' 표지석이 눈에 들어왔다. 필자가 평소 좋아하던 선생의 집터가 '광화문 거리에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기에 휴대폰을 꺼내서 사진을 찍었다. 칼바람 속에서 사진을 찍는 모습이 이상했던지 행인들이 힐끔힐끔 쳐다봤다.

"이 곳은 모더니즘 시인 박인환이 1948년부터1956년까지 거주하며 창작활동을 하였던 장소이다."

표지석에 새겨진 글귀다. 지금은 빌딩 숲으로 변해버린 광화문 한복판이다. 선생이 이곳에서 시(詩)를 썼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박인환 시인은 30세의 나이로 요절을 했다. 선생의 마지막 작품 <세월이 가면>이 떠올랐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세월이 가면>은 노래로도 만들어져서 많은 사람들이 즐겨 부른다. 그래도 선생의 대표적인 시(詩)는 <목마와 숙녀>일 것이다. 이 시는 아무리 되풀이해서 읽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울프의 생애와
 목마(木馬)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김규동 시인은 <박인환 시집>에서 "선생은 시(詩)가, 마치 쓰고 독한 술이 주는 유혹과 회한 속에 있다는 것처럼 위로하면서 괴로울 때 혹은 견딜 수 없을 때 술을 마셨다"고 했다. 술을 과음하면 건강을 해치는데도 '술이 아니면 지탱이 안 된다'는 심정으로 마셨다는 것이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그러했을까.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술은 때로는 좋은 촉매제로 작용한다. 서먹서먹하던 자리가 술로 인해 화기애애해지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지나치게 마시면 문제가 발생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건강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연말을 앞두고 이런저런 술자리가 많을 듯싶다. 12월 겨울바람이 무척 차갑다. 겨울바람 소리가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