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를 강타했던 태풍 덴빈 · 볼라벤 · 산바도 모든 것을 송두리째 앗아가지는 못했다. 극성스러웠던 태풍을 견뎌낸 황금빛 들녘은 풍성함은 물론 아름다움을 연출했다.

 그동안 업무적 · 개인적으로 해외여행이 잦았던 필자는 추석연휴를 맞아 모처럼 국내 여행의 기회를 가졌다. 민족의 대이동- 생각만으로도 겁이 나는 일이었지만, 귀성행렬에 섞이는 더딘 여행도 삶의 냄새가 날 듯 싶어 두려움이 없었다.

 아무튼, 필자의 여행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스마트폰의 내비게이션이 귀성 정체 길을 비켜가도록 영리하게 안내했기 때문이다. 고속도로는 이미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린 상황- 내비게이션이 시시각각 알리는 실시간 정보는 황금빛 들녘을 가로질러 달리게 했고, 코스모스 한들거리는 고갯길, 굽이굽이 강둑길... 목적지를 향한 쉼 없는 흐름을 이어갔다.

 필자가 가을의 정취를 마음껏 즐기면서 예상보다 빨리 도착한 목적지는 변산 해수욕장과 인접한 콘도였다. 철이 지난 해수욕장이라서 주인 없는 파라솔만 쓸쓸할 뿐 백사장, 파도, 소나무 숲들은 계절에 관계없이 좋아보였다.

 참으로 아름다운 해안이다. 평소보다는 시간이 다소 많이 걸렸어도 후회 없는 발걸음이었다. 강한 바닷바람이 파도의 볼륨을 한껏 높여 사람들의 들뜬 목소리들을 삼켜버렸다. 몰려드는 먹구름에 놀랐는지 파도는 더욱 거칠게 출렁댔다. 밀려갔다가 다시 밀려와 바위에 부딪히고 또 부딪히고....유치환(1908-1967) 선생의 임에 대한 '그리움'을 부채질했던  파도의 울렁이 연상됐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물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

 파도소리를 들으며 해변도로를 따라 '채석강'으로 발길을 돌렸다. '채석강'이라는 이름 자체만으로도 호기심을 자아냈다.

"자연산 광어가 있습니다. 가을 전어도 있습니다."

무리하게 호객행위를 하는 횟집 아줌마들이 다소 거슬리기는 했으나, 자연이 아름다워 웃음으로 갈음했다.

 "중국 당나라 시인 이태백이 강물에 뜬 달그림자를 잡으려다 빠져 중국 고사에 나오는 <채석강>과 흡사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지질은 선(先) 캄브리아대 화강암 · 편마암 기저층을 이루며, 중생대 백악기(약 7천 만 년 전)에 퇴적한 퇴적암이 성층과 와층을 이루고 있다."

 채석강 입구에 쓰여 있는 안내문이다. 풍류객 이태백이 술에 취해 강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고 물속에 빠졌다는 전설적 이야기의 '채석강'은 쉽게 다가왔으나, '선(先) 캄브리아대와 중생대 백악기'는 지질학자가 아니고서야 읽기조차도 어려운 문구였다.

 '선(先) 캄브리아(Precambrian) 시대는 현생누대 이전의 지질시대를 일컫는다. 다시 말해 46억 년 전 지구가 형성된 초기부터 고생대 캄브리아 시대가 시작되는 이전 약 5억4200만 년 전까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중생대(Mesozoic)는 2억 2500백만 전에서 6500만 년 전의 기간으로 트라이아스기·쥐라기·백악기로 구분되는데, 이 채석강의 암석들은 중생기의 마지막기인 7천 만 년 전에 퇴적됐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필자는 지금 계산이 안 되는 바위 앞에 서있는 셈이다. 겹겹이 쌓아올린 고서(古書)들을 연상케 하는 암석들이 신비스러웠다.

 국내 여행의 초보자인 자신을 질책하면서 숙소로 돌아왔다. 구름 속의 황금 빛 노을이 바다로 쏟아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