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그 아름다움을 통해서 인간의 마음속에 삶의 풍요로움과 사랑, 신이 창조한 세계의 다채로움에 대한 존경심과 신앙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화가를 꿈꾸다가 포기하고 23세에 소설가가 된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의 소설 <내 이름은 빨강>에 나오는 그림 이야기다. 그림이 인간의 마음속까지 파고드는 신비스러움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대목이다.
 터키의 미술은 본디 세밀화(miniature)로 유명하다. 이 세밀화의 역사는 15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 시대부터 세계 각국의 영향을 받아 그림들이 새롭게 발전해왔던 것이다. 
  터키의 세밀화는 파피루스(papyrus)위에 그려진 유화작품 · 터키의 전통 마블링(marbling) 등 미술품으로서의 가치뿐만이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그 존귀함이 인정되는 작품들이다. 이 세밀화는 소형의 기교적인 회화로 화려한 장식성을 나타낸 역사화 · 풍속화가 많다. 이러한 전통적인 기법이 밑바탕이 되었을까. 길고 깊은 역사성을 지닌 터키에는 오늘날도 큰 아트 페어(art fair)가 자주 열린다. 지난 11월 24일에서 27일까지 열린 '컨템퍼러리 이스탄불(contemporary istanbul)' 아트페어에는 20개국 · 90개 갤러리가 참가했고, 526명 작가의 작품 3000여 점이 선보였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도로마다 차가 막혀 필자는 늦은 시각 가까스로 참가했지만, 전시관에는 예상과 달리 그림 애호가들이 북적됐다. 터키인들의 미술에 대한 열정이 넘쳐났던 것이다.
 이 아트페어 (ci)를 주최한 '이콘 이벤트(ikon Event)'의 '알리 귀렐리' 회장은 "올해로 여섯 번 째 인 신생 아트페어이지만, 머지않은 장래에 세계 5대 아트 페어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는 야심찬 포부를 밝혔다.
 그리고, 여러 명의 한국 유명 작가들과 함께 이 아트 페어에 참가한 A&B 갤러리 성석남 관장도 터키 미술시장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

 "이미 터키 사람들은 미술품 수집을 거의 생활화 할 정도로 수준이 높아졌습니다. 기업인, 탤런트, TV앵커 등 오피니언 리더 들을 중심으로 컬렉터 층의 폭이 넓어졌습니다. 이들이 바로 한국 미술 고객이기도 하고요." 갤러리들의 평가만이 아니다. 자신의 최신작을 들고 전시회에 직접 참가한 서정민 작가도 감탄사를 연발했다.
"제가 이 아트페어에 올해로 3번째 참가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수준이 올라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번에 출품한 저의 작품(8점)이 모두 팔렸습니다. 터키분들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유라면, 전통적인 한지로 만든 작품에 동양적인 정서가 배어있다는 점이 어필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 때로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일 수 있다. 아무튼, 터키 회화는 예로부터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1960년대 이전에는 아카데미 중심이었으나, 그 이후는 다양한 교육기관 · 단체로부터 배출된 작가들이 활동하기 시작했다. 
 둘째, 기성 작가와 신세대 작가들의 화풍이 달라졌고, 그들 사이에서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셋째, 독일 유학을 마친 작가 '무스타 알레르엘'이 귀국한 것을 계기로 판화가 급격하게 발전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터키 작가들은 현대를 연구하고, 현대의 문제들과 자신의 사회적 · 신체적 주변을 연구 · 평가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던 것이다(안선애 박사의 '터키 미술 이야기').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고 했던가. '컨템퍼러리 이스탄불(contemporary istanbul)' 아트페어를 돌아본 필자는 터키 미술이 '옛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도전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림은 정신적인 풍요를 위한 향기입니다"는 A&B 갤러리 성석남 관장의 말을 뇌리에 새기면서 이스탄불의 언덕길을 걸었다.
가을이 떠나면서 신호 하는 듯 플러터너스의 큰 이파리가 필자의 어깨 위에 내려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