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가을 단풍이 도심에도 찾아왔다. 거리에 늘어진 빨강 노랑 나무 잎들이 도시의 번잡함을 잊게 해준다. 더불어 아침저녁 공원을 돌면서 씩씩하게 운동하는 사람들의 활기찬 모습들이 가을의 풍성함을 더해준다. 앞으로 내딛는 발걸음은 물론 앞뒤로 흔들어대는 팔 동작하나하나에도 뚜렷한 삶의 목표가 들어 있는 듯하다. 아- 얼마나 행복한 모습들인가.

 얼마 전 <내 사랑 내 곁에>라는 영화를 접하고 '움직일 수 있고 말을 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행복 넘치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영화 <내 사랑 내 곁에>는 육체가 마비되어가는 루게릭병을 앓으면서 처절하게 파괴되어가는 종우(김명민)와 운명처럼 재회하여 사랑에 빠지면서 그를 간호하는 지수(하지원)의 이야기다. 그들의 노력은 무기력한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고 종말을 맞는다.

 루게릭병은 운동신경세포가 선택적으로 사멸(死滅)되는 질환이다. 대뇌 피질의 위운동세포와 뇌줄기 및 척수의 아래운동신경세포 모두가 점차적으로 파괴된다. 여러 가지 가설만 제기되고 있을 뿐 정확한 발병 원인도 치료법도 밝혀내지 못하는 이 병은 세계적으로 10만 명이 앓고 있고, 우리나라에만도 1,500명이 감옥 같은 어두움 속에서 떨고 있다고 한다.

"장 선배! 제가 쓴 책입니다. 어제(10월 19일) 나왔습니다. 이 책 판매 대금의 일부는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을 위한 기금으로 적립됩니다."
 오랜만에 만난 중앙일보의 이규연 기자(사회담당 에디터)가 내민 책은 '눈으로 희망을 쓰다'라는 단행본이었다. 영화 속 스토리와는 다른 젊은 농구코치 박승일 씨의 실화였다.
<어느 여름날 모기 한 마리가 눈앞에 앉았다. 몇 밀리미터에 불과한 이 모기는 위풍당당 자신의 촉수를 꺼내더니 내 살갗 깊숙이 빨대를 꼽고 만찬을 즐긴다........2미터가 넘는 키도 이 작은 벌레 앞에서 꼼짝할 수가 없다. 이제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건 눈동자뿐이다.>
 영화에서도 종우(김명민)는 얼굴에 앉은 모기에게 손도 써보지 못하고 고스란히 당한다. 몸 전체가 꼼짝도 할 수 없을 만큼 굳어졌기 때문이다.

'눈으로 희망을 쓰다'는 2005년 이 기자가 중앙일보에  연재했던 기사를 근간으로 했다.  독자들의 감동을 유발했던 그의 기사는 영화 <내 사랑 내 곁에>의 모티브가 되었다.
'그렇게 내 몸은 서서히 굳어갔고 움직일 수 있는 건 눈동자밖에 안 남았다."
수소문한 끝에 미국에서 안구 마우스를 구입했다. 그는 눈동자를 굴려서 마우스를 조작하여 사람들과 대화 했다. 그에게는 안구 마우스가 구세주였다. 참으로 기적과 같은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아닌 다른 환자들을 위해 노력한다는 두 가지의 원칙을 세웠다. 하나는 루게릭병 환자를 부각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안구 마우스로 세상과 소통하는 초인적인 노력을 부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루게릭, 눈으로 쓰다."
 이러한 기쁨도 잠시일 뿐. 종국에는 안구 마우스를 작동시키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 장치를 쓰려면 눈꺼풀근육이 어느 정도는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정신적 충격과 고열은 그의 한 조각의 근육까지 멈추게 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박승일 씨는 다른 환자들을 위해 자신의 처절한 모습을 공개하면서 루게릭병을 알리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고통 받는 환자들을 위한 모금을 위해서다. 그의 얘기는 '촛불은 자신을 희생해 주위를 밝게 비추지만 루게릭 환자는 결코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없다. 오히려 가족들의 피를 말려 같이 죽음으로 몰고 간다'고 했다. 그는 또 '루게릭병은 촛불이 아닌 물귀신'이라고도 표현했다. 얼마나 답답하고 고통스러웠으면 이렇게 표현했을까?

 책 '눈으로 희망을 쓰다'는 "당신은 오늘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까?"로 끝을 맺었다.

이리저리 뛰면서 깔깔거리며 보낸 하루를 감사하며, 어려운 병마와 싸우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하면서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